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폭압을 일삼던 연산군이 축출되는 1506년의 중종반정은 사림파에게도 새로운 정치적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써 엉겁결에 남의 등에 업혀 군주가 된 중종은, 아무런 힘이 없어 반정공신들에 의해서
조광조 출생 전후 조선 전기의 시대상황은 국가의 중심 권력이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 라 국가를 이끌어 가는 유교적 명분 그 자체가 위협받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중종반정의 주역들은 동시에 연산군대의 중신들이었다. 바로 이들이 반정 이후 정국공신에 책 봉되어 많은 특혜를 받고 중
, 10년 8월 丙子
중종의 주목을 받았고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그를 통해 권력기반의 안정화를 꾀하였고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였다.
2등으로 급제하여 중종의 주목을 받았고 반정공신들의 득세 속에서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중종은 그를 통해 권력기반의 안정화를 꾀하였고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조광조는 신진세력의 최선두에 서서 적극적으로 그가 구상하던 이상을 정치 현실에 실천하기 위한 개혁정책들을 시도하였다.
중종으로 하여금 훈구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의 신장을 꾀하려는 자구책을 강구케 하였고 그 한 방법으로 중종은 무오, 갑자사화 등으로 물러났던 사림을 다시 등용하였다. 조광조는 이러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사림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중종 초기의 개혁 정치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였다. 조광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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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치사상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 해야 한다고 주장,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 도학정치라고 함.
4. 개혁정치
(1) 소격서 혁파 - ‘도교는 세상
조광조는 1482년 8월 10일 한성에서 출생하였다. 조씨 가문은 대대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바 막강한 무장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북면이 토호적 기반이라는 점 때문에 중앙정부로 진출하여 유력한 가문이 되기는 힘들었다. 계유정난을 계기로 한양 조씨가는 중앙 정계에서 완전히 도태되
4) 중종 :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를 일으키려 함
훈 구 파
사 림 파
ㄱ. 기묘사화를 일으킴.
ㄱ. 조광조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
ㄴ. 3사의 언론관직을 차지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
ㄷ. 사화에 의해 사림 대부분이 제거됨
ㄹ. 중종이
중종 5)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당시의 시대적인 추세는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성균관 유생들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安塘)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1515년(중종 10) 조지서사지(造
조광조라는 한 인물을 통해 되짚어 보면서 한 사람의 위대한 위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후대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 수 있었다. 앞에서도 상술했듯이 조광조는 현실에는 적응하지 못한 실패한 개혁가일지는 몰라도 진정 우리사회에 꼭 존재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등불과 같은 인물이